2060년, 세계는 다시 시작되었다

우주가 138억 년 동안 채워 온 그릇이, 마침내 넘쳤다.
넘친 힘이 흘러든 마지막 빈틈은 사람이었다.

오랫동안 인류는 잘못된 질문을 했다.

'우리가 어떻게 이 힘을 발견했는가.'

이것은 틀린 질문이다. 인류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않았다. 인류는 그저, 넘쳐흐르는 무언가의 경로에 있었을 뿐이다.
연대기

세계가 무너지고, 서로 다른 질서가 남기까지.

포화~ 20세기 말우주의 힘이 더 이상 흩어질 곳을 잃고 생물의 신경계로 흘러들었다.

우주는 탄생부터 한 방향으로 흘러왔다. 이것을 엔트로피라 부른다.

무질서가 증가하는 방향. 에너지가 퍼지고, 물질이 흩어지고, 구조가 붕괴하는 방향. 이것은 법칙이 아니라 방향성이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우주의 모든 에너지는 이 흐름을 따랐다. 물질 안으로, 공간 안으로, 시간의 결 안으로. 138억 년에 걸쳐 스며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에너지가 더 이상 스며들 곳이 없어졌다.

그것이 언제부터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세계대전의 포화 속이었는지, 냉전의 침묵 속이었는지, 아니면 그보다 훨씬 전이었는지. 다만 돌아보면 징후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설명되지 않는 국소적 물리 이상. 밀폐된 공간에서 온도가 자발적으로 상승하거나, 정지한 물체가 외력 없이 이동하거나, 측정값이 반복적으로 이론치를 벗어나는 현상들. 각각의 사례는 측정 오류, 장비 결함, 환경 변수로 처리되었다. 아무도 이것들을 하나의 현상으로 묶어 읽지 못했다.

학자들은 설명되지 않는 에너지 잔량을 관측해왔다. 우주 전체의 에너지 방정식을 계산할 때마다 미세하게, 그러나 일관되게 남는 무언가. 그것은 측정 오류로 분류되었고, 이론의 빈틈으로 방치되었다. 세계가 이상 현상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가 저물 무렵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그 침묵의 시간 동안, 우주의 갈 곳을 잃은 에너지는 마지막으로 남은 빈틈을 찾아냈다. 복잡하고, 정교하며, 우주에서 가장 밀도 높은 정보 처리 구조.

생물의 신경계였다.

각성2000년대 초 · 최초 보고일부 인간이 물리 법칙을 넘어서는 힘을 보이기 시작했다.

전 세계 인구 중 특정 신경계 구조를 가진 사람들에게서 먼저 변화가 나타났다. 이들이 선택받은 이유는 없었다. 에너지가 흘러들기 쉬운 구조를 가졌을 뿐이었다. 이것을 일부에서는 재능이라 불렀고, 일부에서는 결함이라 불렀다.

설명되지 않는 신체 반응들.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비정상적인 근력이 발현되거나, 특정 개인이 주변 온도에 영향을 미치거나, 감각 기관이 물리적 한계를 초과하여 작동하는 사례들이 보고되기 시작했다. 의학계는 이것을 심리적 반응이나 신경계 이상으로 분류하려 했다. 그러나 사례는 계속 늘었고, 지역과 인종과 나이를 가리지 않았다.

각성은 한 번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후 태어난 세대에서도 같은 변화가 이어졌다. 누가 어떤 힘을 얻을지는 예측할 수 없었지만, 그 힘이 자라는 방향은 그 사람이 살아온 방식과 무관하지 않았다.

국가들은 이들을 제도 안으로 편입하려 했으나 많은 곳에서 실패했다. 핵무기보다 강한 인간을 기존의 틀이 수용할 수 없었다. 각성자들은 통제를 거부하거나, 힘을 이용해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 했다. 이들 중 누구도 처음부터 전쟁을 의도하지 않았다. 다만 각자의 판단이 다른 사람의 생존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대전쟁2010년대 중반 ~ 2040년대 중반각성자들의 충돌은 국가뿐 아니라 세계의 물리 법칙까지 깨뜨렸다.

전쟁이라고 부르지만, 단일한 전선은 없었다. 시작한 날도, 끝난 날도 없었다.

국가 대 국가의 충돌이 아니었다. 각성자 집단 대 비각성자 연합, 각성자 집단 대 각성자 집단, 기존 권력 대 새로운 힘. 이 모든 충돌이 동시에 다른 장소에서 다른 이유로 벌어졌다. 어떤 지역에서는 내전이었고, 어떤 지역에서는 쿠데타였으며, 어떤 지역에서는 그냥 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는 현실이었다.

핵보다 강한 인간이 깃발 하나 들고 도시를 접수하던 시대였다. 영웅과 괴물이 구분되지 않았고, 어제의 구원자가 내일의 재앙이 되었다. 그 시절의 이야기는 수없이 전해지지만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아는 자는 없다. 이름만 남고 진위는 사라졌다. 그 시대를 직접 산 자들은, 말을 아낀다.

그러나 대전쟁의 진짜 공포는 인간들 사이의 싸움이 아니었다.

우주의 에너지 자체가 이미 포화 상태였다는 것이다. 거기에 수백, 수천의 각성자들이 동시에 그 에너지를 끌어당기고 밀어내고 비틀기 시작했다. 이미 금이 간 구조물을 모든 방향에서 두드리는 것과 같았다.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국소적이었다. 여름에 눈이 내리거나, 특정 구역에서 중력 방향이 어긋나거나, 소리가 전달되지 않는 지역이 생겼다. 시간이 지나면서 물리 법칙이 교란된 지역에서 생물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변이는 무작위적이었다. 일부는 단순히 크기가 커졌고, 일부는 전혀 다른 무언가가 되었다. 교란이 심한 지역은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구역이 되었다.

전쟁의 후반부를 넘어서면서 싸우는 것보다 살아남는 것이 더 어려워졌다. 어떤 지역에서는 각성자와 비각성자가 처음으로 같은 공포 앞에 섰다.

공통의 적이 생긴 것이 아니었다. 공통으로 소진되었다. 그것이 전쟁을 끝냈다. 그러나 큰 불길이 잦아든 뒤에도 잔불은 오래도록 탔다. 국지전과 소탕전, 기록에 남지 않은 더러운 일들이 재편의 시대까지 이어졌고, 그 일들은 어디에도 적히지 않았다.

재편, 그리고 현재대전쟁 이후 · 2060년 현재살아남은 지역들은 마지막까지 기능했던 질서를 중심으로 다시 모였다.

살아남은 세력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질서를 다시 세웠다. 가장 오래 알았고, 마지막까지 사람을 먹이고 지킬 수 있었던 질서로. 어떤 곳은 전쟁 이전의 것을 버리고 새로운 체제를 선택했다. 어떤 곳은 문명 자체를 포기하고 살아남는 것만을 택했다. 어떤 곳은 폐허 위에서 시스템을 복구하고 더 단단한 질서를 구축했다. 그리고 어떤 곳은, 끝내 아무것도 다시 세우지 못하고 과거의 영광 속으로 사라졌다.

현재 세계는 표면적으로는 안정되어 있다. 전면전은 없다. 그러나 국경마다 크고 작은 전선이 끊이지 않고, 이 어정쩡한 평화는 합의가 아니라 소진의 결과다. 누구도 다시 전부를 걸 힘이 없을 뿐, 싸움이 멈춘 적은 없다.

물리 교란의 잔재는 여전히 남아 있다. 변이 생물이 서식하는 접근 불가 구역은 줄어들지 않았다. 대전쟁 중 일어난 균열이 봉합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멈춘 것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국제 정세

유로파

국가가 제 역할을 잃자, 유럽의 살아남은 지역들은 영지와 사람을 직접 지킬 수 있는 가문 아래 모였다. 국경도 선거도 없이, 가문들이 영지를 나눠 다스리는 느슨한 연합이다.

하지만 강하다는 이유만으로 누구나 귀족이 될 수는 없었다. 누가 자신의 힘을 이해하고, 그 힘에 따르는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지를 가려낼 기준이 필요했다. 유로파는 근원에 닿았음을 증명하는 것을 귀족의 기준으로 삼았고, 그 과정을 연구하고 체계화한 학문이 근원학이다.

이능력의 표면 아래를 끝까지 파고들어 자기 힘에 대한 하나의 답에 닿은 자를 근원자라 부른다. 작위는 근원을 증명한 개인에게 내려지고, 그 이름과 책임을 함께 짊어진 집안이 하나의 가문으로 인정된다. 근원자는 극소수지만 하나가 군대를 상대하며, 이 질서를 위협하는 자는 이단이 된다.

주요 가문과 기관8개 기록
헤이스팅스

기사 가문. 무력으로 유로파를 떠받쳐 온 명문이나, 충언을 마다하지 않는 기질 탓에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 최전방을 지키는 자리에 섰다. 북방 우레발굽 부족의 남하를 정면으로 막아내는 방패. 데 라 베라와 더불어 유로파 양대 무력 가문으로 꼽혀 왔다.

리히텐슈타인

외교와 행정의 가문. 유로파의 복잡한 가문 관계를 조율하고 질서를 감찰하는, 연합의 행정 척추. 화려하지 않으나 이 가문 없이는 의회가 굴러가지 않는다.

메디치

학문의 최상위 가문. 근원학을 체계로 세우고 로그오스를 설립한 유로파 지성의 정점. 가문의 권위는 영지나 군대가 아니라 지식에서 나온다.

르페브르

본래 평민 광부 집안. 콜레트 르페브르가 근원에 닿았음을 증명해 작위를 받은 뒤, 집안 전체가 신흥 귀족 가문으로 인정되었다. 유로파에서 혈통을 이겨내고 귀족이 된 드문 사례. 그래서 가문의 격은 낮고, 본인들조차 귀족보다 광부의 정체성을 더 가깝게 여긴다.

에쉬-올람

사제이자 장인의 가문. 의지로 형상을 빚어 자격 있는 자에게 장비를 건넨다. 모든 작품에 의도적인 결함을 새겨, 그것을 감당하는 자에게는 영웅의 무구가, 감당 못 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되게 한다. 신화의 무구를 만드는 손이되, 영지도 군대도 탐하지 않는다.

몽클레르-보프레

유로파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넓은 땅의 가문. 산의 광맥과 초원의 곡창을 혼인으로 합친 이래, 유로파의 빵과 철 대부분이 이 가문의 영지에서 난다. 의회 의결권의 핵이자 연합의 곳간.

아카데미 로그오스

근원학의 전당. 능력의 표면 아래를 끝까지 파고들어 자기 힘에 대한 답을 찾는 법을 가르치는 기관. 이곳의 목표는 졸업장이 아니다. 근원에 닿고, 그곳에서 내린 답을 증명하는 것이며, 그것을 해낸 극소수만이 근원자의 이름을 얻는다. 대부분은 닿지 못한 채 학교를 떠난다. 문은 사실상 귀족에게만 열려 있으나, 아주 드물게 재능 하나로 그 문을 넘는 평민도 존재한다.

유로파 의회

단일 지도자도 공통 헌법도 없는 유로파에서, 가문들이 모여 연합의 일을 의논하는 유일한 장.

북방

가장 깊이 망가진 땅. 정부도 도시도 오래 버티지 못했고, 홀로 정착한 자는 겨울과 변이체를 넘지 못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동과 사냥을 함께할 부족으로 모였고, 이능력을 몸에 새겨 환경을 견디는 법을 택했다. 살아남은 방식은 훈련이 되었고, 훈련은 부족의 전통이 되었다. 그것을 내재 강화라 부른다.

땅에는 변이체가 들끓는다. 북방인은 사람과 싸우기 전에 이미 괴물과 싸우며 자란, 세계에서 가장 실전적인 전사들이다. 중앙 정부는 없다. 크고 작은 부족들이 각자의 영역과 이동로를 차지하고, 어제의 동맹이 오늘의 적이 된다.

북방인들 사이에는 언젠가 흩어진 부족을 하나로 묶을 단 하나의 칸이 온다는 예언이 전해진다. 그러나 그 자리는 아직 비어 있다.

주요 부족3개 기록
우레발굽

광활한 평원을 지배하는 북방 최대 부족. 내재 강화를 밀도와 중량에 집중시켜, 몸을 무겁고 단단하게 만들어 부딪치고 짓밟는다. 위계가 가장 철저한 부족으로, 강함이 곧 서열이며 명령은 절대적이다. 남하 원정이 잦아 진군로에 놓인 것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변이체든 가리지 않고 부수며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그늘진 숨결

가시거리가 5m 도 되지 않는 오염된 삼림의 사냥꾼들. 내재 강화를 감각과 은신으로 발전시켜 체온과 소리와 기척을 지운다. 사냥의 전통을 부족의 근간으로 삼으며 숲의 변이체조차 그들에게는 사냥감이다.

심해의 작살

북방의 해안선과 빙해를 장악한 부족. 내재 강화를 끈질긴 지구력과 놓지 않는 힘으로 길러, 빙해의 거대 변이체를 작살로 잡아 살아간다. 며칠이고 줄을 놓지 않는 싸움이 이들의 일상이다. 도전과 결투를 명예로 여겨 족장 자리가 자주 바뀌며, 오늘의 족장이 내일 끌려 내려오는 일이 흔하다.

대한민국

세계가 무너지는 동안 대한민국은 정부와 행정망을 지켜냈다. 그러나 전력과 생산, 기술과 수송을 가장 빠르게 복구한 것은 기업이었고, 시스템의 주도권도 그들에게 넘어갔다.

능력은 재료일 뿐이다. 무엇을 타고났느냐가 아니라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가 값을 정한다. 약한 능력도 맞는 자리에 놓고 장비와 기술을 곱하면 쓸모가 된다. 거인이 없는 나라가 거인들 사이에서 살아남은 방식이다.

국가는 법과 행정을 쥐고, 기업은 그것을 현실로 만드는 생산과 기반시설을 쥔다. 서로를 필요로 하지만 서로를 신뢰하지 않는다. 이 불편한 공존이 대한민국을 움직인다.

주요 기업3개 기록
태산 중공업

방산과 중공업을 맡는 기업. 높은 신뢰성으로 제작된 장비와 병기는 전 세계 군수 시장에서 명품으로 통한다. 그들은 능력이 아니라 강철을 믿는다. 변덕스러운 이능력보다, 몇 번을 써도 같은 값을 내는 장비가 진짜라는 철학. 거인이 없는 나라가 거인과 맞설 수 있는 것은, 이 기업이 쥐여 주는 강철 덕분이다.

흑호

보안·경호·전술 파견을 파는 민간 군사 기업. 계약서에 작전 범위를 명시하고, 범위 밖의 일은 하지 않는다. 용병이라 부르면 외근직이라 정정한다. 깐깐하고 정확한 계약 조건으로 악명 높은 것으로 유명. 다만 서비스는 확실하다.

페레그리나 재단

수송과 인프라를 맡는 기업. 한국의 전력망과 통신망 일부를 운용하며, 핵심 사업은 글로벌 물류다. 국경이 무너지고 변이체가 들끓는 세계에서 병력과 물자를 가장 빠르고 안전하게 옮기는 곳. 한국의 근간을 쥔 셋 중 유일한 외국계이며, 설립자의 이력도 재단의 자금줄도 공개되어 있지 않다. 가장 수상하지만, 가장 필요한 곳.